윤만보 작가
전 경찰서장(총경)
“전하 황공하옵니다. 몸을 피신하기에는 소신의 의복으로 변복하시는 것이 낫겠기에…….”
“알았다. 알았노라. 웬 놈들이라 더냐? 몇 놈이라 더냐?”
임금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지만 궁금했다.
“사태는 나중에 아뢸 것이옵니다. 우선은 몸부터 피하소서.”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차 가깝게 들렸다. 왕은 이강달에게 끌려서 옆방으로 피했다. 안도치는 왕의 침소에 있는 촛불을 죄다 꺼버렸다.
방안의 사물들은 어스름이 형태만 보일 뿐이었다.
안도치는 임금이 누웠던 자리에 이불을 쓰고 누웠다. 조금 있으니 괴한 몇 놈이 쫓아 들어왔다.
“저기 왕이 누워 있소.”
한 놈이 누워있는 안도치를 가리켰다.
“웬 놈들이냐.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안도치는 당황하지 않고 위엄을 갖춰 왕처럼 행동했다.
“밖에 내관이 없느냐? 웬 놈들이냐?”
“우리는 연경에서 황제의 명을 받고 온 밀사들이오.”
“웬 밀사가 밤에 불시에 쳐들어와서 난동들이냐? 밀사는 예의가 없느냐?”
“그대는 이제 더 이상 고려왕이 아니오. 고려왕은 덕흥군으로 정해졌소이다.”
한 사나이가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일었다.
“욱.”
안도치는 칼을 맞고 나무토막 쓰러지듯 맥없이 쓰러졌다.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전하께서 한 발짝이라도 멀리 달아나야 하는데…….’
안도치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쓰러진 안도치의 몸 위로 몇 번에 걸쳐서 칼질이 더해졌다. 베고, 찌르고, 목에 칼이 박히자 안도치는 최후로 부르르 떠는 것으로 몸부림을 그쳤다.
그 사이 내시 이강달은 공민왕을 업고서 어둠 속을 달렸다.
“어디로 가느냐?”
등에 업힌 왕이 나지막이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허겁지겁 도망을 치는지라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무작정 달아나는 것이었다.
“공주에게로 가자.”
왕이 갈 곳을 정해주었다. 기왕에 죽는 것이라면 공주(공민왕의 비, 노국대장공주)와 함께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에 변고를 맞은 공주는 의외로 침착했다. 숙위대장을 직접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어둠이 풀릴 때까지 신원이 불명한 자가 접근할 때는 가차 없이 베도록 하라.”
공주는 왕을 침실 뒤에 딸린 밀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불을 푹 씌워서 짐짝처럼 숨겼다.
“전하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이렇게 견뎌내시옵소서. 소첩이 목숨을 바쳐 전하를 지켜드리겠나이다.”
공주는 왕을 뒷방에 숨겨두고 자신은 내실 입구에서 위엄을 갖추고 앉아서 밤을 새웠다.
왕을 살해했다는 보고를 받은 김용은 급히 현장으로 쫓아왔다.
“황제의 명을 받들었나이다.”
적도들은 거사를 치른 것을 원나라 황제의 명이었음을 내세웠다. 김용이 그리하도록 지시를 하였던 것이다.
김용은 왕의 침소로 들어가 확인했다. 방안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죽은 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방바닥을 흥건히 적셨고 조청처럼 엉겨 붙어서 진득거렸다. 피비린내가 온 방안에 진동했다.
피로 얼룩진 죽은 자의 얼굴을 확인한 김용은 일순간 깜짝 놀랐다.
죽어있는 자는 왕이 아닌 내시 안도치였다.
김용은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으므로 왕과 측근 인사들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자는 임금과 용모가 비슷하다는 말을 들어온 내시 안도치가 분명했다.
“전하가 아니다.”
김용은 일부러 침착하려 애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무슨 소리인지요?”
암살 현장을 직접 지휘한 김수가 놀라서 물었다.
“전하는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를 침소에 뉘어놓고 소란한 틈을 타서 이곳을 빠져나갔다.”
“어떡하지요? 어디로 갔을까요?”
김수와 곁에 있는 부하들이 당황하여 허둥댔다.
“아직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했을지 모르니 우선 이곳부터 샅샅이 뒤져라! 그리고 이곳의 경비를 튼튼히 하고 전하를 배알하러 오는 누구도 이곳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나는 전하의 행방을 찾아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