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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신의 조국에 신의를 지키다.Ⅱ

기사입력 2025-11-2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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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롱 논설위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이란 뜻의 애국지사를 법적으로는 순국선열과 (순국한 사람)과 애국지사(생존 또는 항거 사실이 있는 사람)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나 일반적인 대화에서는 의사,열사,선생을 포괄하는 존칭으로 사용한다. 무력투쟁을 통한 의사(안중근,윤봉길 등), 비 무력적 저항 또는 자결을 통해 열사(유관순,이준 등), 애국지사 중 높은 학식과 덕망이 높고 국가에 대한 헌신적인 삶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선생(김구,안창호,이태준 등)이라 부른다(다음 백과사전. 제미니)

 

선생은 20세에 순흥 안문의 안위지와 혼인을 전후로 부모님이 연이어 세상을 뜨시고 다음 해에 태어난 큰딸 수남, 작은딸 수용의 재롱과 신혼의 단꿈을 뒤로하고 남강 나루에서 배 타고 삼랑진에서 혈혈단신 상경하게 된다.(1907)

외 증손녀의 증언에 의하면 선생이 상경 후 어린 두 딸을 혼자 키우던 안위지 여사가 1913년 세상을 떠난 이후 차녀 수용은 양녀로 가게 되고 수남은 홀로 친척과 교회를 오가며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다 14세 때 산 너머 붕디미(대암동) 20세 청년 성산 이문 이조영(영숙)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홀로된 시조부, 시부와 두 시동생과 시누이를 어린 나이의 며느리가 감당하기는 너무 가혹하였다.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누군가가 아버지 이태준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일본 순사에게 고발하여 집배원이든 남편 이오영이 취조를 당하고 집배원을 그만두게 된다.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증세를 겪고 불령선인(不逞鮮人) 집안으로 찍혀 수남의 아들은 14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수남은 시어머니 없는 시댁에서 가혹한 시집살이와 가난 고에 시달려도 명절에는 부뚜막에 부모님을 위한 밥 두 그릇을 차린 수남의 애틋한 효심 그리고 생활고에 의한 식중독으로 사망(1946). 기억조차 없는 부친 이태준이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로 평생을 고난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수남의 삶. 그것은 오랫동안 사회의 그늘에서 힘겹게 살다간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선생께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모든 걸 희생해가며 또 다시 독립운동을 할 마음이 있을까?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했기 때문에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하려고 한 것처럼 선생이 공산주의자들과 연결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나라 어떤 세력이라도 도움이 절실한 때였는데.... 선생이 사망한 후 몽골인들은 몽골 민족을 구한 그의 시신을 수습해 자신들이 성스러운 산이라 부르던 자이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으나 세월이 흐른 뒤 몽골 정부는 무덤을 찾기 위해 정부 기록 보관소를 뒤지고 TV광고 등을 통해 포상금을 걸면서까지 대대적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무덤을 찾지 못함은 참으로 아쉽다.

 

선생의 순국 104주기 추념식(12.9.)을 며칠 앞둔 오늘. 여운형 선생께서 1936년 선생의 자이산 묘소를 찾아서 한 말 이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조선사람 무덤은 ...’을 소개하며 촌부는 선생이 어떤 과정으로 김필순의 형제상회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선생의 약사(略史)에 대한 졸고를 놓는다.

 

더함안신문 (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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