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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6-2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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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신의(神醫)

조국에 신의(信義)를 지키다. Ⅰ

기사입력 2025-10-1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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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국(Mongolia) 면적은 156로 한반도의 약 7배이고 인구는 2024년 기준 약 350만명으로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적은 나라 중 하나이다. 수도는 붉은 영웅이라는 뜻을 가진 울란바토르로 인구는 약 160만명으로 추정되며,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로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과의 최단 직선거리는 2,272km이나 김해에서 비행기로는 약 4시간 소요가 된다. 어릴 때 몽고(蒙古)라 기억했는데 무지몽매한 옛것이라는 뜻의 몽고는 중국이 몽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비하적인 뜻이 있어 지금은 몽골국으로 불리고 있다. 2024년 방문객은 약 85만명이며 우리나라는 중국, 러시아 다음으로 방문객이 많으며 그 숫자는 연간 약 20만 명으로 전체의 29%를 차지하고 있고 한인회에 등록된 우리 교민의 수는 약 1800명이다. 함안군과 울란바토르 항을구는 2011.7.10.MOU를 체결하여 수박 재배기술 전수 등 활발한 상호교류를 하고 있다.

 

200077일 이태준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여 재몽골한인회와 연세의료원이 주축이 되어 이태준 기념공원을 건립하였다. 이태준 기념공원은 울란바토르 시 복드칸(Bogd Khan) 산 남쪽 기슭 자이승 승전탑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2007년 양국 정상회담 시 동 공원의 영구 보전 필요성이 제기되어 20081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와 몽골 자연환경부 간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부지의 안정적 사용기반을 마련하였다. 20106월 국가보훈처와 연세의료원의 지원을 받아 공원 내 이태준 기념관을 개축하여, 주몽골대사관, 재몽골한인회, 연세의료원, 몽골 정부 측 인사로 구성된 이태준 기념공원 관리위원회가 공원을 관리·운영하다가 이번에 재개축하게 되었다.(국가보훈처)

 

이상롱 논설위원


촌부는 대암 이태준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김동균)’의 일원으로 2023년에 이어 두 번째 방문하게 되었다. 목적은 대암 이태준 기념관 개관식(2025.9.4.)참석과 교민 자녀들에게 기념사업회 장학금 수여를 위해서였다. 이 기념관은 현존 기념관을 철거하고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연 건평 약 400)이다. 수많은 애국지사 중 해외에 기념관이 있는 독립운동가는 이태준 기념관이 유일한 줄 알고 있는데 이태준 기념관은 선생이 태어나신 고향 우리 고장 함안군 군북면에도 현대식 기념관이 서거 100주기인 2021.11.16.에 건립되어 성황리에 운영중이며, 기념관 옆에 현재 49평 규모의 게르형 체험관을 올 11월 개관을 목표로 신축 중에 있다.

 

 

몽골은 1948년 북한과 수교 후 대한민국과는 1990.3.26.에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관계 수립 후 10년 뒤인 2000년에 울란바토르에 이태준 기념공원을 건립하고 10년 뒤 기념공원 내 이태준 기념관을 설치하게 되는 이태준은 어떤 사람이며 왜 머나먼 몽골에 본국보다 먼저 기념관이 설치되었을까?. 1883.11.21.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1149번지에서 인천이씨 이질과 박평암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태준은 부인 안위지와의 사이에 수남과 수용 두 딸을 두었으며 대암(大岩)은 호이다. 유년 시절 인천이씨 문중 재실인 도천재(道川齋)’에서 유학과 한문을 익힌 선생은 1907년 서울로 상경하여, 김필순이 운영하는 김형제상회에 점원으로 근무하다 당시 세브란스의 학생이든 김필순의 권유로 190724세의 나이로 세브란스 의학교 2기생으로 입학, 졸업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하게 된다.

 

선생은 중국 남경에서 김규식, 유동렬, 서왈보 등과 함께 비밀군관학교 설립을 위해 몽골에 왔으나 자금란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하여 고륜(울란바토르)에 정착하게 된다. 라마교의 영향으로 기도나 비과학적인 치료법에 의존하든 몽골인에게 근대적 의술을 익힌 선생의 의술은 몽골인들의 7-8할이 감염되어 있든 화류병을 치료하고 나아가 국왕 보그드 칸의 어의가 되어 까우리(高麗)의사이태준은 신인(神人)이나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에 비유될 정도로 존경을 받았으며, 또한 몽골 주둔 중국군 사령관 가오시린의 주치의로도 활약했다. 이런 공으로 선생은 19197월 국왕으로부터 귀중한 금강석이란 뜻의 에르데니 인 오치르라는 명칭의 제 31(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의 훈장을 받았다. 선생은 한인사회당 비밀당원으로 고륜을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편의 제공은 물론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석 여비로 거금 2천원(현재가 약 1억원 상당)을 제공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군의관 감무(監務)로도 활약했다.

 

1920년 여름 모스크바 레닌 정부는 상해의 임시정부에 200만 루불의 독립자금 지원을 약속했고 이 가운데 1차분 40만 루불의 금괴(쌀 네 가마 무게) 4만 불을 선생이 운반보관 중이었다. 19212월에 몽골 국왕과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부대가 중국 군벌을 몰아내고 고륜을 점령하여 무자비한 학살, 약탈을 감행할 때 자금 운반과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폭탄 제조 기술자 헝가리인 마자르의 소개를 위해 북경으로 향하던 중 공산주의자와 긴밀하게 협의했다는 이유로 백위파(왕당파)에 의해 억류 · 가택연금 중에 운게른의 사형 집행조 5인에 의해 잔인하게 처형되고 금괴는 분실되었다. (계속)

 

 

 

더함안신문 (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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