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함양신문

함안군 참전용사 회고록-25

이수돈(1930년생) 지내시는곳 : 가야읍 성내북길

  ▶이수돈

주민등록은 1930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29년 12월 24일 산인면 부봉리 구일에서 태어나 산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 일제의 군사훈련소였던 청년훈련소에 2년 동안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마땅히 할 일도 없어 농사일을 하던 중 외사촌이 부산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네 몫은 나중에 따로 챙겨주겠다는 말만 믿고 부산으로 내려 가 보수도 거의 없이 숙식하며 일을 했다. 사업이 번창했으나 무역업에 손을 대면서 공장이 부도나는 바람에 5년 간의 부산 생활을 접고 다시 고향 산인으로 돌아왔다. 2년 여, 고향에서 머물다 직장을 구하러 부모님을 놔두고 단신으로 가야로 나왔다. 형편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고 집세 마련이 힘들어 이집 저집 전전하며 14번이나 이사를 했었다. 결혼은 군대 갔다 온 후 22살에 했는데 딸 넷을 두고 있다.

1950년 7월 5일 징병 1기 소집생으로 징집통지서를 받고 입대를 하게 됐다. 6·25전쟁이 터진 지 얼마 안 돼 피난을 떠나기 전이었다. 가야역에 집결하여 열차를 타고 부산 대연동으로 이동해 22연대에 들어갔는데 열흘이 채 못 되어 다시 부산진역에서 열차를 타고 대구역으로 이동했고 다시 영천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깜깜한 저녁에 영천역 마당에 집결해 날을 지새웠다.

새벽 동이 트자 역 마당에 놓인 트럭 수십 대에 나눠 타고 어디론가 또 이동했다. 이십 리쯤 지나 초등학교 마당에 내린 우리는 부대 배치를 위해 다시 트럭에 나눠 탔다. 교관이 여기부터는 실제 전시상황이고 전쟁터이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며 총을 배부했다. 처음 대해보는 총을 거머쥐니 겁부터 덜컥 나고 실탄 장전도 못해 손을 부르르 떨었다. 부대원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흘렀고 다들 식은땀을 흘렸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에 사방에서 나는 포탄소리와 굉음, 총소리에 혼비백산했다. 그렇게 십리 쯤 이동해 부대 배치를 받았는데 8사단 15연대였다. 15연대에서는 학력에 따라 임무를 맡겼는데 나는 초등학교를 나왔지만 중학교 졸업자라고 무턱대고 손을 들었다. 당시 중졸자는 20명 남짓. 속으로 못 배운 무지랭이만 군에 다 모였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그렇게 학력을 갖춘 사람은 본부에 남기고 나머지는 전투지의 소총부대로이동 배치시켰다.

나는 연대 수색대에 배치돼 활동했다. 당시 수색대 소대장이 김해 출신의 김병조 소대장이었는데 내게 아주 각별히 대해줘 지금도 이름 석자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전방에서 직접 전투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전쟁터에서 겪은 기억은 생생하다. 그 중 비참하고 뇌리에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영천이 아주 격전지였는데 그때 당시 영천전투 상황을 겪은 나는 사상자가 너무 많아 후방에 오면 남자는 씨가 말라 구경도 못할 줄 알았다. 워낙 사상자가 넘쳐났고 70~80대 남자까지 포탄병으로 부역에 투입될 정도로 전투 상황은 긴박했다. 전투를 지휘하던 상사가 전사해 심지어 일등병이 분대장을 맡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전투경험 없이 전장에 투입되다 보니 계급에 상관 없이 하루살이 목숨이었다. 그 와중에 나도 분대장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격전지였던 영천에서 아군이 승리하면서 후퇴하는 인민군을 쫓아 중부전선으로 밀고 올라갔는데 평안북도까지 북진을 거듭했다. 평안북도 진격 당시가 9, 10월 초였는데 눈이 내리고 아주 추웠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무조건 후퇴했다. 인민군 패잔병들이 뒤에서 총을 쏘고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물밀 듯이 덮쳐 내려오니 국군은 서울까지 퇴각해야했다.

후퇴하면서 강원도 홍천전투에서 격전을 치렀는데 10연대 방어선이 무너졌다. 당시 11월 경 중공군이 끝도 없이 밀고 내려왔으나 실탄이 모자라 반격도 어려웠다. 인해전술은 ‘사람바다’ 라고 명명할 정도로 밀고 내려오는 적의 수가 끝이 보이지않았다. 나는 방공호에 있다가 중공군에게 잡혀 포로가 됐다.

만주로 가게 된다는 적의 말에 이젠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를 못볼 것이라는 공포가 밀려왔고 죽을 각오로 야밤을 틈타 산으로 도주했다.

전쟁통이라 온 산에 방공호를 판다고 적병이 무더기로 깔려있고 날이 새면 비행기 폭격으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나흘을 넘게 굶고 산에서 헤매니 정신도 없고 동서남북 분간도 되지 않았다. 사방에 깔린 적을 피해 폭격 속에서도 틈만 나면 혼신을 다해 산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 생존의 본능으로 산을 올랐던 것 같다.

산속에서 어찌나 추위에 떨었던지 발은 동상에 걸렸다. 산꼭대기에서 추위를 모면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지폈고 군화를 벗고 언 발을 녹였다. 얼마나 발이 부어올랐던지 벗었던 신발이 들어가지 않아 무진 애를 먹었다. 얼마 후 산꼭대기에서 단양이 고향인 10연대 소속의 아군을 만났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부모형제를 본 것처럼 눈물이 났다. 여차해서 낙오되거나 도주한 병사 6명이 모였는데 단양 출신의 지리에 밝은 병사를 따라 단양으로 갔지만 적병이 많아 다시 횡성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11월에서 12월로 접어드는 매서운 겨울 추위에 아랑곳하지않고 횡성의 강을 목숨을 걸고 건넜다. 적병이 보이면 포복하고 숨기를 수십 차례, 사지를 왔다 갔다 하며 갖은 고생을 했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내리 5일을 굶기도 해서 밤에는 더더욱 이동하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던 중 미군 척후병한테 발견됐다. 한국인 통역병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군이라고 말을 해 주지 않아 인민군으로 오인을 해 갖은 애를 먹었다. 그리 야속할 수 없었고 분한 마음이뼛속 깊이 사무쳤다. 배가 너무 고파 미군에게 잘 보이려고 시키는 일은 뭐든지 했다. 당시에는 살기 위해 정말 개버러지처럼행동을 했던 것이다. 나는 동상이 너무 심해 다리까지 얼어 골병이 들었는데 미군이 치료해 준다고 어깨 언저리를 바늘 같은 것으로 꾹꾹 눌러주곤 했는데 그게 지금 생각해보니 통증을 잊게 해주는 마취제였던 것 같다. 병이 호전되지 않고 자꾸 깊어져 가던 중 어느 날 잠든 새 대구 육군병원으로 후송돼 있었다. 동상이 아주 심해 동상환자로 넉 달 간 병원에 있으면서 장기 치료를 받았다. 389부대에 2달 정도 머물렀는데 군의관이 집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거듭 묻기에 보내주면 지금이라도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애절하게 말했더니 군의관이 쪽지를 써 줬는데 그게 제대증이었던 것 같다.

명예제대를 하고 보상금조로 5만원(당시 논 2마지기 값)을 받고 집으로 내려왔다. 직접 전투 참여 경험은 별로 없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후퇴하고 포로로 잡히고 도망 다니면서 겪은 전쟁 통의 상황이 지금도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 당시 상황은 지금도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선연히 남아있다. 당시 전쟁터의 어려운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북진 시 신창이란 마을에서는 좌익분자라고 죽인 시체가 수천 명을 넘었고 시체가 즐비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국토산하에 시체로 넘쳐났다. 전시 보급상황도 아주 나빴다. 당시 1개 분대원이 7~8명이었는데 1개 분대 보급 담요는 3장 정도였다.

막사는 구경도 힘들었고 잠자리가 없어 한뎃잠은 예사로 잤다.

6, 7월에 비가 많이 오면 덮는 담요는 흙투성이가 됐고 흙투성이 담요라도 덮고 자면 복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할까. 보급상황이 이러니 부대 선임하사인 중사가 담요를 가로채 가기도 했고 담요 때문에 무지막지 구타를 당하기도 일쑤였다. 전투 당시는 차갑게 식은 주먹밥도 이틀 만에 겨우 하나 얻어먹는 실정이었다.

전투 와중에 신발이 헤지거나 없어지면 죽은 인민군 신발을 벗겨 신기도 하고 인민군복을 입기도 했다. 심지어는 작은 신발을 억지로 껴 신기도 했다. 찬 밥 더운 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고 입고 신을 수 있으면 그만도 다행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동상환자가 유달리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1970년 가야 참전유공자회 총무를 4년 간 맡으면서 제대로된 회원 명부도 작성되어 있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려 동네방네 수소문을 해 가며 명부(회원 70명)를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후 상이군경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고 국무총리, 장관상 등 숱한 상을 받았지만 정부의 참전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아쉽기만 하다. 1953년 이전에 입대한 사람이 참전유공자에 드는데 지금은 전국적으로 20만도 안된다. 해방 후 좌·우익이 대립해 사상 논쟁을 했고 안보태세가 허술해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발발하며 국토분단의 비극을 불러왔다. 전후 세대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와 교훈,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고귀한 뜻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참전용사들의 넋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거름이듯 그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건장한 대한민국의 남아라면 국토방위의 의무를 자랑스럽게 다하고 안보의식은 철통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함안에도 참전유공자 가운데 최고령자가 91세이고 80세 이하는 거의 없다. 기초생활수급자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도 주위에는 많다. 얼마 남지 않은 노후가 편안할 수 있게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신경을 써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쟁에서 얻은 동상으로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 사시사철 발이 시리고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서 계속 약을 먹고 있다. 전쟁으로 얻은 병인데 상이군인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다.

젊은 세대들이 6·25전쟁에 대해 좀 더 바르게 알고 인식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나라를 잘 키워나갔으면 하고 바란다.

더함안신문(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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