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함양신문

사라진 정취와 풍경이 그 곳에 숨쉬고 있다.

부산의 사람사는 이야기가 가득한 산복도로

여행가방을 들쳐 맨 사람들이 수도 없이 오간다. 서류 가방을 한 손에 든 중년 신사는 잰 걸음으로 부산역을 향해 뛰고, 여행을 온 듯한 젊은이들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신호등이 바뀌자 도로 위의 차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깜박이는 교통신호등 초록불을 바라보며 부산역 맞은편 초량시장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부산항의 바닷내음과 함께 구수한 돼지국밥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한다. 구수한 냄새가 지나가자 향신료 향이 뒤를 따른다. 넉넉한 풍채를 자랑하는 러시아인, 가게를 기웃거리는 파란 눈의 외국인…. 여기가 외국인지 부산인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외국인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개항 1번지로 일본인들이 오갔던 초량동 일대에는 아직도 외국인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옛 백제병원 전경

지도를 꺼내 들고 수첩에 계획을 써 내려갔다. '백제병원, 남선창고, 초량교회, 이바구담장, 168계단, 김민부 전망대, 이바구 공작소, 더 나눔센터, 유치환 우체통'을 적었다. 그리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었다. 부산의 역사와 사람 사는 이야기를 가득 담은 산복도로 '초량 이바구길' 여행의 시작이다.

 '초량 이바구길'은 한국인이 세운 부산 최초의 종합병원인 옛 백제병원에서 시작한다. 색채가 화려한 모텔 건물 맞은편에 붉은 벽돌로 벽을 장식한 백제병원 건물이 서 있다. 백제병원은 1921년 8월 '백제의원'으로 개업했다. 백제병원은 당시 부산에서 벽돌로 지은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였다. 일본 여성과 결혼한 뒤 장인의 눈에 들어 경비를 지원 받은 최용해 씨가 병원을 세웠다고 한다.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부산의 3대 병원으로 평가받은 백제병원은 시설이 가장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저명한 의사를 초빙해 인건비를 과다하게 지출한데다 병원 신축 때 빌려 쓴 사채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재정난에 허덕이게 됐다. 거기다 허가를 받지 않고 행려병자 시신으로 인골인체표본을 만든 게 문제가 됐다. 갈수록 병원 손님이 줄어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병원은 문을 닫았다. 최용해 씨는 일본으로 야반도주했다. 병원은 중국집으로, 다시 예식장으로 바뀌었다. 1972년 불이 나 건물 외부만 남고 내부는 모두 탔다. 이후 오래도록 방치됐다가 2012년 7월 부산시 근대건조물로 지정됐다. 이런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건물 안에는 나무 한 그루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서 있다.

 무심한 나무의 인사를 뒤로 한 채 건물을 빠져 나와 바로 뒤에 있는 '남선창고'로 향했다. '할인 행사'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나부끼는 대형마트 건물 옆에 낡은 벽돌 담벼락이 외딴 섬처럼 서 있다. 1900년 바다였던 초량이 매립되기 전 바닷가에 세워진 부산 최초의 물류창고였던 남선창고의 흔적이다. 지금은 대형마트 주차장 한쪽에 남은 벽으로만 남선창고의 이바구를 들을 수 있다. 남선창고의 바닥에는 항상 물이 흘렀다. 함경도에서 물건을 가져온다 해서 '북선창고', 명태를 보관했다고 해서 '명태고방'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곳은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에 물류창고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100여 년 동안 냉동창고 역할을 해왔던 남선창고는 2009년 붉은 벽채만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초량동 이바구길 담장갤러리

 남선창고에서 이정표를 따라 초량중로 47번길에 들어선다. 벽과 벽으로 이뤄진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휘어지고 꺾어지는 골목을 오가다 보면 '담장 갤러리'를 만난다. 어린 젖먹이를 등에 업고 빨래를 하는 어머니, 익살스러운 표정의 동네 꼬마…. 흑백사진 속에서 왁자지껄했던 동네 골목길 풍경이 절로 그려진다.

 골목길 풍경에 젖은 것도 잠시. 초량초등학교가 나타난다. 찬바람 위로 종소리가 울린다. 순간 길을 잃어 망설이다 마음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금세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안내한다. 마치 어린이장난감 블록처럼 켜켜이 작은 집들이 쌓여 있다. 부산의 산들은 19세기 말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 6·25전쟁 때에 사람들에게 허리를 내어주고 삶의 터전이 돼 주었다. 개항기 때 바다와 가까운 매립지는 상업·공업, 항만시설이 자리를 잡았다. 가난한 부두 노동자들은 수풀이 우거진 산비탈에 집을 지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부산으로 몰려든 귀환동포, 피란민 들도 먹고 살기 위해 산 중턱과 고지대까지 올라가 집을 지었다. 집이라고 해야 얇은 판자와 기름 먹인 마분지로 지은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비와 바람을 피할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옛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문구점

 1970년대까지 마땅한 급수시설이 없어 당시 초등학생들은 50~100원을 주고 물장수에게 물을 사서 산 아래 부산항까지 이고 날랐다. 골목의 공중화장실 앞은 아침이면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로 북적였다.

 헉헉거리며 가파른 비탈길을 오른다. 유모차를 끈 젊은 주부가 "어딜 가느냐"고 묻는다. 그는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 사업 덕분에 적막했던 골목을 찾는 여행객이 늘면서 마을에 생기가 돈다"며 웃었다. 부산시는 2011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으로 주거지가 정비됐고, 고지대의 역사, 문화 등 지역자원을 활용해 주민참여형 마을 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초량동 이바구길도 이 사업 중에 하나다.

  ▶한 할머니가 계단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다.

 초량초등학교에서 계속 걸어 올라가자 168계단이 나타났다. 아득할 정도로 높게 만들어진 계단의 끝은 이미 푸를 대로 푸르러진 가을 하늘에 닿고 있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168계단의 중간 쯤에 '김민부 전망대'라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골목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쫓아가다 보니 김민부 전망대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김민부 시인은 널리 알려진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작사했다. 2011년 3월 14일 그의 생일에 맞춰 산복도로 빈집 4채를 헐어 전망대가 만들어졌다. 숨박꼭질하던 새끼 고양이는 어느 새 저만치 달아나고 눈 앞에 탁 트인 부산항의 전경이 펼쳐진다. 항구에 묶인 배들이 파도의 들썩임에 춤을 춘다. 발 아래 놓인 무채색의 콘크리트 건물들은 졸리는 듯한 표정으로 무심히 춤사위를 바라보고만 있다. 배들의 춤사위보다 무채색 산복도로 가옥에 더 눈길이 간다. 옥상 위에는 파란 물탱크, 녹슬어버린 운동기구, 스티로폼에 흙을 쌓아 키운 채소들이 소박한 일상 풍경을 만들고 있다.

 

  ▶초량동 이바구길에서 내려다본 바다

모든 풍경의 지난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바구 공작소로 향한다. 이곳은 해방 때부터 한국전쟁, 월남 파병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녹아든 산복도로의 삶을 담고 있는 곳이다. 이바구 공작소에 앉아 가만히 산복도로의 삶에 귀를 기울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듯 마주보는 집들, 굽어진 골목을 놀이터 삼아 뛰어 노는 아이들, 어른들의 억세고 투박한 삶….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동네의 풍경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험난했던 삶이 남긴 산복도로가 풀어놓는 '이바구'가 지금은 잊혀지고 사라진 정취와 풍경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더함안신문(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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